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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동(서울대 강사,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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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創氏改名' 政策(제33권, 제34권)
창씨개명정책이란 무엇인가? 정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의 친족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호적을 새로 편제할 때에 전 국민을 일률적으로 호주를 정점으로 하는 친족관계에 따라 존속, 직계,
남성을 우위로 하고, 비속, 방계, 여성을 그 밑에 두는 가족질서를 갖는 친족집단으로서 파악하여 통치체제의 기초로
삼고자 하였다. 이 가족집단이 바로 '호' 또는 '이에(家)'로 표현되며, 국가는 호적을 통해 가족 내의 질서와 윤리를
유지확보하고, 이를 신민 일반에 적용하여 '사민평등'의 이념에 합치하는 규격화된 '이에'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는 호주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경영체이며, 氏가 바로 이에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일본의 근대국가는 이에를 단위로
한 위계적 가족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친족체계는 부계혈통을 바탕으로 한 본관 중심의 문중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과 姓은 바로 그 제도적
표현이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뒤에도 친족 상속을 중심으로 한 민사법체계를 관습법에 위임함으로써 일본의 성문법체계를
조선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다만 관습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총독부 권력이 개입함으로써 조선의 친족 상속관습을 서서히
변화시켜가고 있을 뿐이었다. 중추원의 관습확정과 같은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전통적인 문중 중심의
친족체계가 유지되고 있었고,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강화되기도 하였다.
창씨개명정책은 1939년의 조선민사령 개정으로 추진되었다. 조선 병합 이후 몇 번의 민사령 개정이 있었으나, 조선인의
친족 상속관습에 대하여 큰 폭의 개정은 전혀 시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왜 성문법을 제정하여 친족 상속관습에
대대적인 변형을 가하고자 하였던 것일까? 하나는 창씨개명이 가지는 형식적인 이유 때문이다. 조선인의 징병을 전제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을 외형적으로 없애려고 한 시도가 바로 창씨개명정책이었다. 일본식 씨를 창설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고치는 것이 바로 창씨개명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것은 민사령 개정의 본질적인 의도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성을 없애고
씨를 창설하는 것은 바로 친족제도의 변화를 의도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문중을 철폐하고 일본식의 이에를 창설함으로써,
일본식의 위계적 가족국가를 본격적으로 조선에도 도입하려는 시도가 바로 창씨개명정책이었던 것이다. 문중을 철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국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강화되어 가던 기층조직으로서의 친족을
철폐하는 것은 사회의 새로운 조직유형을 창출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었다. 황국신민이란 바로 이에를 바탕으로 위계적으로
조직된 인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창씨개명정책은 횡적으로는 징병제 실시를 위한 사전조치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만, 종적으로는 조선의 전통적
친족조직인 문중을 철폐함으로써 이에를 단위로 한 일본식 사회적 연결망을 창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황민화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기도 하였다.
제33권은 창씨개명정책과 관련된 총독부의 문서를 중심으로 편집하였다. 이는 오노문서에서 발굴한 자료이다. 크게 네
가지의 자료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 자료는 [氏制度에 관한 건](1940)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12건의 총독부 문서이다.
1)[朝鮮同胞에게 傳來의 名字를 許與하는 것을 反對하는 건에 대한 請願書]라는 제목의 문서는 貴族院議長 앞으로 제출된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일본인의 청원이다. 2)[아이누인의 氏에 關한 件]이라는 자료는 北海道廳 學務局長이 작성한 자료로
아이누인의 창씨개명의 경험을 기록한 자료이다. 3)[請願書에 나타난 誤謬]라는 자료는 法務局 民事科의 자료인데, 앞의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일본인의 청원을 반박하기 위하여 작성된 자료이다. 4)[e 養子
異性養子 및 氏制度의 制定에 대하여]라는 자료는 미야모도(宮本元) 法務局長의 담화인데, 제도의 취지를 홍보하는 자료이며
5)[半島人에게 氏制度의 制定]이라는 자료는 '내지'의 신문에 홍보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6)[司法上의 內鮮一體의
具現]이라는 제목의 자료는 미나미 總督의 담화를 수록한 것이다. 이 밖에 6건의 자료도 모두 총독부에서 내부검토용으로
작성한 자료이다. 이처럼 위의 자료는 창씨개명을 추진하던 총독부의 의도와 이에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던 일본인의 생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창씨개명을 추진하던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주는 자료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수록한 자료는 同民會 本部에서 작성한 [명함(名刺) 교환 名簿](1940)로서, 일부이기는 하지만 조선인으로서
창씨개명한 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창씨개명 이후 조선인의 이름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에 속한다.
앞으로 이런 종류의 자료를 더욱 많이 발굴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 자료는 朝鮮總督府 法務局에서 발간한 것으로 [氏制度의 解說](1940)이라는 제목의 자료인데, 이를 통하여
창씨개명을 추진한 총독부의 의도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를 통하여 간단히 창씨개명의 내용을 살펴보자. 우선
총독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창씨개명을 사법상의 내선일체의 구현이라고 내세우고 있었다. 통칭 창씨개명정책은 두 가지의
법령으로 구성된 것인데 1939년 제령 제19호 조선민사령 중 개정의 건은 e 養子와
異姓養子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고, 1939년 제령 제20호 씨명에 관한 건은 씨제도를 제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법무국장 미야모도의 해설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씨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내선일체를 희망하는 조선인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뒤에, 씨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이에 관념을 확립해야 할
필요를 역설하고 있다. 또한 서양자와 異姓養子 제도를 도입하는 것 역시 조선인이 매우 꺼려하고 있었지만, 이를 통해서
문중관념의 약화를 의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씨제도가 유포되어도 성은 존속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내지인식 씨를 설정하는 것이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호적의 기재양식이 변화하였기 때문에
창씨계를 제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성이 모두 씨로 변화한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 차이를 재일조선인 연구자 金英達은 법정창씨와 설정창씨로 명확히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창씨계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든 조선인은 제도적으로 새로운 씨제도, 즉 이에제도를 강요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정창씨인
것이다(김영달, {創氏改名の硏究}, 1997, 未來社 참조). 또 창씨개명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역사적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네 번째 자료는 역시 총독부 법무국에서 작성한 [朝鮮人의 氏名에 關한 件에 關한 第75回議會 擬問擬答](1940)이라는
제목의 자료이다. 이 자료는 일본의회에서의 심의를 위하여 작성한 것으로 모의 상황을 설정하여 법령의 허점에 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총독부가 창씨개명정책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제34권은 창씨개명 정책을 해설한 4건의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1)綠旗日本文化硏究所, {氏創設의 眞精神과 그 手續}(綠旗聯盟,
1940) 2)笠原敏二, {半島에서의 氏設定改名의 手續}(1940) 3)南雲幸吉, {창씨 및 씨명변경 수속과 계출
서식}(1940) 4)鄭光鉉, {姓氏論考--朝鮮家族法論考}(1940)가 그것이다. 창씨개명정책이 추진되면서 많은 조선인이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창씨와 개명의 본질과 방식에 대하여 큰 혼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해설자료의 도움이 무척 필요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개의 해설서가 대체로 구성은 대동소이하지만, 조금씩의
차이는 있다. 세 번째 자료는 변경의 절차와 서식에 대하여 자세하게 해설한 것이다. 마지막 자료는 해방 이후 저명한
친족법학자였던 정광현의 저술인데, 정광현은 창씨개명정책이 친족체계에 변형을 가져올 것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어 이채롭다.
조선의 가족제도로 기존의 종회 대신 同氏同姓同本의 새로운 친족단체가 출현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개별 가족형태로의 분화과정이
더욱 촉진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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