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해동(서울대 강사, 한국사)
1/6
{일제하 전시체제 정책사료총서}의 황민화정책 관련 자료는 제30권부터 제48권까지 모두 1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황민화정책을 다시 6개의 세부 주제로 나누었는데, 가)農村統制政策(3권), 나)創氏改名政策(2권),
다)戶籍政策(2권), 라)參政權政策 및 言論, 出版政策(두 주제 합쳐서 2권), 마)言語, 敎育政策(9권) 등이 그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총력전체제로 돌입하면서 조선도 이른바 총동원체제로 전환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발발시킨 이후 이른바
'총력전'(total war)을 전개하면서 자기체제를 총동원체제로 재편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어 조선에도
역시 총력전 전개를 위한 총동원체제가 강요되었는데, 이는 강력한 파시즘 체제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조선에서
최대한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동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물적 자원의 최대한의 동원을 위하여 강력한 전시 통제경제체제를
확립해 간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인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동원하는 일은 어쩌면 총력전체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더욱
절실한 일이었다.
조선을 총동원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로 요청되었던 것이 이른바 황민화정책이다. 황민화정책이란, 말 그대로
조선인을 황국의 신민 즉 국민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정책으로 미나미 총독 이후 역대 총독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내선일체 역시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 최종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과제였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한
후 식민정책의 기조로 채택하고 있던 동화정책이란 다름 아닌 내선일체정책과 황민화정책으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황민화정책이란 무엇인가? 조선인을 황국신민=국민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데 필요한 일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먼저 조선인의 姓을 일본식
氏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른바 창씨개명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외형적인 모습, 즉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
구별을 없애는 것이 바로 창씨개명정책의 목표였다. 조선인을 군대에 징병할 때에 이름만으로도 민족을 구별할 수 있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다음으로 조선인이 조선인으로서의 의식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초등교육을
확대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일일 터인데, 초등교육을 의무교육화하고 이를 통하여 조선인에게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을 강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무릇 근대국가의 국민이란 초등의무교육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초등교육을
통하여 민족으로서의 지표로서 민족의식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하는 한국어조차 자연스럽게 말살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성인들에게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이는 눈앞의 인적 동원을 위해서도 절실한 일이었다.
이를 위하여 이른바 '國語全解運動'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같은 조선인 언론을 1940년에 폐간한 것도 같은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인에게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무할 수 있는 조선인 언론은 더 이상 유효한 통치의 매개물이 될 수 없었다. 더욱이 조선어를 사용하는 언론이란
국어전해정책의 입장에서도 허용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우리는 이 밖에도 각종 의례와 절차를 통하여, 그리고 전조선인을
애국반을 통하여 총동원단체에 포섭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민족 정체성을 박탈하는 정책을 실시했음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황민화정책은 명백히 민족말살정책(ethnocide)이었다
조선에서의 황민화정책은 궁극적으로 인적 동원의 최고 형태, 즉 징병으로 귀결되는 것이어야 했다. 조선인이 진정 황국신민=국민일
수 있는 것은 징병이라는 지표를 통해서야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끌고 가기 위해서 조선인을 징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징병을 통해서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는 완성되는 것이기도 했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과 규율은
징병제를 통한 군대에 의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1942년에 1944년부터 조선인에게
징병제를 실시할 것을 공포한 이후 징병제 시행을 위한 준비과제로서 호적과 寄留를 정비하는 것과 의무교육의 실시를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의무교육은 당장 실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1946년부터 조선인에게도 의무교육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1946년에는 학령아동의 50%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징병연령에 도달하였으나
초등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청년들을 위한 청년훈련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징병을 실시할 정도로 인적 동원을 강화하고 황국신민=국민으로서의 의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조선인에게도
반대급부를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지방행정 자문기관 선거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주어지고 있던 조선인의 참정권을,
일본인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전면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징병제 시행을 공포한 1942년부터 은밀하게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황민화정책이 민족말살정책으로서의 성격뿐만이
아니라 아주 심각한 차별을 수반한 동화정책이었고 일체화정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민화정책이 가지는 이중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황민화정책은 두 가지 차원에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창씨개명정책과 일본어사용 강제정책처럼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징병이나 징용과 같은 인적 동원의 효율적 전개를 위한
전제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호적정책이나 의무교육정책 그리고 인적 동원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성격을 가진 참정권정책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황민화정책 자료를 6개의 세부 주제로 나눈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전시체제기 농촌통제에 관한 자료를 첫번째 주제로 편집하였다. 농촌통제정책은 총동원체제하 노동력의
강제동원과 징병의 배경을 이루는 농촌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전제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어 [創氏改名]정책과
[戶籍]정책에 관한 자료들을 배치하였는데, 이 정책시행을 위한 극비문서들과 법령의 해설자료들을 중심으로 모았다. 다음으로는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 위하여 검토한 [극비 정책자료]를 모았다. 이와 아울러 언론출판에 대한 통제와 '國語'(=日語)보급정책
그리고 교육령 개정과 관련한 황민화 교육에 관한 자료들을 배치하였다.
|